안나푸르나-9/10
컨텐츠 정보
- 1,836 조회
- 5 댓글
- 목록
본문
09일차-10월 11일/밤부-촘롱-지누단다
Bamboo-Chomrong-Jhinu danda
통배추 김치
오늘로서 제주의 집을 나선 지 열흘째다. 어서 집에 가서 김치 냉장고에 있는 통배추 김치를 먹고 싶다. 지난 겨울 담근 이 김치는 중간에 무를 썰어 넣어
시원한 맛이 기막히다. 우리 조리팀의 음식도 결코 만만치 않지만 난 역시 어디 다니지 말고 붙박이처럼 집에서 밥 먹고 살아야 하나보다.
05:30분 기상이지만 이미 01시에 일어나 앉아 메모를 하고 모디콜라의 물소리를 들으며 아침을 맞았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청량감으로 가득하다.
그냥 이대로 하루 종일 물소리를 들으며 뒹굴고도 싶다.
07:30분 출발했다. 출발하자마자 또 급경사길을 오르고 내린다. 도대체 이 길을 우리가 정말 오르고 내린 적이 있나 싶다. 몇 천 개가 될지도 모를 돌계단을
오르는 동기들을 뒤에서 보면 마치 걸어서 하늘까지 올라가는 것 같다. 시누와에서 촘롱의 악명 높은 돌계단은 4,000개라나 몇 천 개라나. 하산하면서도
안나푸르나 남봉을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카메라에 담는다.
영정사진
11;45분 촘롱 도착. 촘롱에서 포카라에서 헤어졌던 성수 스님을 다시 만났다. 스님은 여기서 다시 우리가 갔던 ABC에 가신다고 한다. 니라전 그릉과 함께.
점심식사를 기다리면서 개인과 부부 등 일행 모두의 ‘영정사진’을 찍었다. 내게 이렇게 영정사진을 찍으면 무병장수한다는 전설이 있으니 찍을수록 좋은
일이다. 무슨 현상범 촬영하듯이 먼저 내가 미리 준비한 번호표를 들고 한 장을 찍고 다시 번호표 없이 몇 장씩을 찍었다. 이렇게 해야 슬라이드쇼를
편집할 때 개인과 부부의 사진을 이름과 함께 한 컷에 넣을 수가 있고 또 다음에 사진을 주고받을 때도 누가 누군지 확실히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잘들 생겼다.
일행들 모두가 한 인물 하는 분들이어서 영정사진촬영하기도 쉽다.
석우 스님과 성수 스님을 각각 촬영한 후 또 함께도 촬영했다. 사진을 하면서 비구니 두 분을 이렇게 촬영하긴 처음이다. 성수 스님은 오시는 길에 힘든 일이
있으셨으면서도 우리들에게 시종 미소를 잃지 않았다. 성수 스님과 헤어질 때 내가 데이트 신청을 했더니 스님은 기꺼이 신청을 받아주셨다. 언젠가
스님 계시는 절에 찾아가 스님 주시는 절밥도 얻어먹고 스님 계시는 절도 한 번 돌아보고 싶다. 늦은 가을에.
점심을 먹고 13:20분에 출발했다. 촘롱에서 하산길을 조금 더 가면 길이 갈라지는데 우측 길은 우리가 처음 타다파니에서 왔던 길이고 좌측은 우리가 처음
가는 하산길이다. ABC 트레킹에서 푼힐을 가지 않는 사람들은 비레탄티에서 보는 우측, 즉 모디콜라를 따라 올라 여기를 거쳐 올라가고 우린 이 길을 통해
계속 내려간다.
히말라야에선 특히 안나푸르나 트레킹에선 늘 그랬지만 내리막길이라고 쉬울 거라는 생각은 빨리 버릴수록 좋다. 여기에서 내려가는 길도 그냥 절벽을
내려가듯이 급하고 급한 경사길이다. 무릎이 약한 사람은 이 길을 오르긴 해도 내려가긴 힘들 것 같다.
조금 내려가다 보니 멀리 까마득한 계곡 아래에 집 몇 채가 보이는데 거기가 오늘 묵을 지누단다라고 한다. 저길 내려가다니, 벌써 다리가 떨릴 지경이다.
그래도 엄살 부리지 말자. 이 길을 올라가는 트레커들을 생각하고 더구나 무거운 카고백을 두 개나 짊어지고 올라가는 포터들을 생각하면 가벼운
이런 복장에 내려가는 사람이 힘들다고 하면 죄 받는다.
석우 스님의 경우/지누단다(Jhinudandan)에서
내리막 돌계단은 한 시간 동안이나 계속 되어 14:22분에 지누단다에 도착했다. 이제 해발 2,000미터 이하로 왔다. 나하고 이미향 씨 외에 모두들 계곡
아래에 있다는 노천온천으로 갔고 여기에서 사진 찍을 것도 없는 난 오랜만에 머리도 감고 망중한을 즐겼다. 롯지에 있는 기념품 파는 가게의 주인 아가씨도
촬영하고 모델료 대신 야크털 모자를 하나 사기도 했다.
저녁식사는 무사히 트레킹을 마친 우리들의 자축과 내일이면 헤어지는 스태프들과의 송별회를 겸하는 자리가 되었다. 양을 잡아 수육 전골을 비롯한
몇 가지 요리를 만들었고 코펠주를 돌렸다. 나도 산행 처음으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제일 연장자인 오희성 씨가 일어나서 우리 모두와 인솔책임자인
혜초 박 대리와 가이드 라나를 비롯한 스태프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자고 했다. 코펠주는 내가 제의했다. 스텐리스 코펠 하나를 비우고 거기에 술을 채우고는
돌렸다. 자신의 양에 따라 마시면 된다. 석우 스님께도 술잔이 갔고 스님도 입술을 대 마시는 시늉을 하시곤 내게 잔을 돌렸다.
스님을 곁에 두고 그것도 비구니를 곁에 두고 양고기에 술이라니 얼마나 부자연스런 풍경인가. 그러나 정말 이상하게도 석우 스님은 조금도 부자연스런
분위기를 만들지 않았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하고 자리를 피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우리들과 어울리시며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지 않았다.
그런 자연스러움이 이런 일에 꼼생이 같은 나를 마음 편하게 했고 오랫동안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간직하게 되었다.
해탈이라고 하던가. 스님은 우리 중생들의 삶을 바다 같은 마음으로 이해하시고 트레킹 내내 마치 수학여행 온 여학생 같은 미소와 온화함으로 함께 어울려
주셨다. 도대체 여승들과 어떻게 산행을 하나 하는 내 처음의 껄끄러움과 불안은 첫날부터 사라졌다. 내 생각이 짧고 경솔한 탓이다.
축제
식사를 마치고는 모두들 마당으로 나갔다. 가이드 라나를 비롯한 포터 조리팀 등 스태프 모두가 함께하는 공연이 시작되었다. 작은 북을 치며 이젠
내 귀에도 익은 레삼 삐리리를 비롯한 네팔의 민요를 불렀다. 카메라로 동영상으로 담으며 나도 따라 불렀다.
’우레러 자우끼 다라마 반장 레삼 삐리리...‘
이어서 우리 동기들이 아리랑을 시작으로 ‘비 내리는 호남선’을 타고 ‘꽃 피는 동백섬’으로 가더니 동기 숙녀들이 우르르 나가 노래와 춤으로 분위기를
한국식으로 바꾸어버렸다. 분위기가 워낙 흥겨워서인지 롯지에 묵고 있던 기럭지 긴 외국인들도 모두 나와 우리들의 축제를 보면서 박수 치며 함께
즐거워했다.
음력 9월 15일의 밝은 달이 히말라야 자락을 비추고 모디콜라의 물소리와 함께 밤이 깊어갔다. 내일의 하산길을 생각해 9시경 축제는 끝나고 모두들
숙소로 돌아갔다.
생각
이 생각 저 생각에 잠이 오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고생고생 하며 멀고 먼 여기에 온다. 왜 오는 걸까. 난 사진을 찍으러 오지만 다른 사람들은 왜 올까.
고생하면서 와도 그저 두 눈으로 훑어보고 그만인데 그러려고 오는 걸까. 사진도 안 찍으면서 여기까지 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나는 가로 세로 3:2의 프레임으로 히말라야를 잘라서 보지만 그들은 안 그런다. 한 번에 주욱 훑어 눈으로 보고 가슴에 저장하고 추억으로 남긴다. 사진하는
나처럼 구도며 노출이며 심도 등을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고 풍경을 즐긴다. 빛이 어디서 오든지 상관하지도 않는다. 나는 프레임에 든
풍경만 기억하지만 그들은 모두를 다 기억한다.
그런 그들이 부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들은 평생에 단 한 번 이 먼 곳까지 오면서 컴팩트 카메라 하나 메모장 하나 없이 그냥 온다. 그냥 와서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맘껏 즐긴다. 사진 찍는다고 무거운 카메라 들고 헐떡이는 내 스스로가 불쌍하기도 하다. 나도 때로는 그들처럼 그렇게 여행하고 싶다.
10일차-10월 12일/지누단다-사울리 바자르-나야풀-포카라
Jhinu danda-Syouli Bazar-Nayapul-Pokhara
마지막 ‘빠떼루’
이제 히말라야에서의 마지막 아침이 되었다. 룸메이트 하경수 씨는 일어나자마자 먼저 침낭을 접고는 이제까지 신지 않은 양말 입을만한 옷가지 등을 챙겨
지금까지 고생한 스태프들에게 몽땅 갖다 줘 버린다. 돌아가서 필요하면 다시 사면된다고 하면서. 그의 그런 따뜻한 모습에 가슴이 찡하다. 그러나 난
그들에게 줄 게 아무 것도 없다. 마지막 입을 내의 한 벌과 모두 땀에 젖은 옷뿐이다.
아침마다 침낭을 침낭 주머니에 말아 넣는 게 고역이고 큰 행사다. 조금씩 말아가며 공기를 빼야하는데 마치 레슬링을 하듯이 온몸으로 누르면서 하는 일이다.
그래서 난 이 일을 ‘빠떼루’(레슬링의 파테르 Parterre)라고 이름 붙였다. 이 일이 너무 힘들어 예전에 쿰부에 갔을 때는 롯지에 모포만 하나 있어도 침낭을 펴지
않고 추워도 그냥 모포만 덮고 자기도 했다. 한 번 행사를 마치고 나면 기진할 정도였고 해발 5,000미터가 넘는 고락셉에서 이 행사를 하고는 침대에
누워버리기도 했다. 이번에 내가 집에서 구입해서 가지고간 침낭은 크기도 크고 이걸 말아 넣는 게 중노동과 같은 큰 행사인데 이젠 이 행사도 오늘 아침이
마지막이다. 오늘 나는 마지막 빠떼루를 성공적으로 수행해서 이겼다.
아침식사- 넷이 앉은 테이블에 계란프라이가 다섯 개 나왔다. 무거운 촬영장비 메고 다니는 ‘사진가선생’이 하나 더 먹으라 해서 난 두 개를 먹었다.
07:15 하산 출발을 시작했다. 출발하자마자 쉬지 않고 내려가서 마침내 모디콜라를 건너더니 이번엔 다시 죽어라 하고 올라간다. 그러니 모디콜라가 까마득한
발아래에 있다가 바로 눈앞에 있다가 그런다. 강물 따라 좀 평평히 내려가면 어디가 덧나는지 왜 이렇게 밖에 못 가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내려가면서도
모두들 연신 뒤를 돌아다본다. 안나푸르나의 하얀 설산들이 우리들을 배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울리바자르(Syauli Bazar) 가는 길
폭염이 계속되어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걷는다. 그래도 즐거운 건 눈요깃감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논둑에서 주인 몰래 나락을 뜯어먹는 원숭이 녀석만
빼 놓고 벼가 익어가는 층층의 다랑논들이 정겹고 아름답다.
가다가 쉬는 시간이어도 늘 쉬지는 못한다. 그럴 때 사진 한 컷 더 찍고 메모 한 줄 더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동기들은 그런 내가 걱정인지 사탕이며 육포며
비타민을 갖다 주며 허기져 죽지 말라고 격려한다.
12:37분, 폭염 속 5시간을 걸어 사울리바자르에 도착했다. 얼마나 힘들고 더웠는지 오죽하면 내가 ‘바탄의 죽음의 행진’이라고까지 했을까. 그러나 그러면도
우리가 내려온 같은 길을 산더미 같은 짐을 지고 올라가는 포터들을 보면, 그리고 20병들이 펩시콜라 여섯 상자를 지고 그 길을 올라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만 입을 다물게 된다.
다섯 시간을 걸어서 오는 동안 물을 페트병 하나와 500cc 보온병 하나를 다 마셨다. 그 물도 일찍 떨어져 도착하자마자 물을 세 컵이나 마셨다. 그렇게
물을 마시고도 쉬야 한 번 하지도 않는다. 땀으로 다 나가니까 그런 모양이다.
신발과 양말을 벗어보니 발가락이 땀에 젖어서 목욕탕에서처럼 쪼글쪼글하다. 에구구, 불쌍한 내 발.... 아무래도 난 발에 애착이 많은 것 같다.
점심으로 비빔국수가 나왔는데 맞은 편 숙녀가 준 반 그릇까지 해서 한 그릇 반을 다 먹었다. 뱃속에 거지가 든 것일까. 그러고도 디저트로 나온 석류를
두 쪽이나 먹고.
여기엔 한국 막걸리가 있다고 씌어 있는데 몇몇 동기들이 사 먹어보더니 이 맛이 그 맛이 아니란다.
마침내 나야풀(Nayapul)
13:50분 나야풀을 향해 출발. 사울리바자르에서 나야풀까지는 크게 힘든 오르막 내리막이 없다. 그러나 땡볕을 정면으로 맞으며 걷는 게 너무나 힘들다.
물만 만나면 모자를 적시고 소매를 적시고 해도 뜨겁기는 마찬가지다. 등산화가 뜨거워져서 도랑물만 만나면 푹 담가서 열을 식히곤 했다.
그래도 도착할 지점은 가까워지고 14:40분에 8일 전 처음 점심을 먹었던 비레탄티에 도착했다. 잠시 쉬는데 박찬호 씨가 가게에서 사서 따라주는
콜라맛이 그냥 꿀맛이다.
집에서 비비큐를 시킬 때도 ‘콜라는 가져오지 마세요!’했었는데 그 콜라가 이렇게 맛있다니, 도대체 콜라를 몇 년 만에 먹어보는지도 모르겠다.
잠시 쉬고는 다시 걸어서 15:30분, 나야풀에 도착했다. 이로써 9일간 걷고 걸으며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우리들의 트레킹이 모두 끝났다. 포터들이
지고 온
카고백을 우리가 타고 갈 버스에 싣고는 그들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수고비를 건네주고 손을 잡으며 아쉬워하고 있는데도 몇몇 동기들은 다시
지갑을 열어
마음을 전했다.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못내 아쉬운 것이다.
여기서 뜻밖에도 지난 4월 쿰부 히말라야에 갔을 때 보조가이드를 했던 ‘수만’이를 만났다. 남체로 하산하던 날 내게 마니석의 글자 ‘옴마니반메홈’을
가르쳐
주던 사람이다. 그는 이번에 한국 어느 대학의 ABC 트레킹에 가이드로 참가해서 지금 막 내려오는 중이라고 한다. 네팔의 나야풀에서 그를 다시 만날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때의 가이드 니마를 물어보니 니마는 EBC에 갔다고 한다. 그도 나도 어수선하고 바빠서 더 이상 이야길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다.
인연이란 이런 건가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