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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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겨울 직장의 부녀회에서 제주의 어느 양로원 위문을 가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이군이 말하길래 따라나섰다.
부녀회에서는 라면과 간식 등을 사가지고 갔는데 연로하신 할아버지 할머니 대부분은 몸이 아파서 누워 있었다. 원장님 말씀은 대부분이 환자라고 하신다. 그러다가 여기서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더니 먼저 사진관에 연락해서 영정사진을 찍고 시청에 연락을 한 후 화장을 한다고 한다. 돌아가신 후 사진을 찍지 말고 살아계실 때 찍으면 안 되느냐니까 장례비용에 포함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면 비용이 들더라도 우리가 영정사진을 미리 찍어드리면 어떻겠느냐니까 그러면 너무나 좋겠다고 한다.
직장에 사진 동호회가 있어서 회원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우리가 장수사진(영정사진이라는 말이 좀 거시기 해서 장수사진이라고 하기로 했다)을 찍어주자고 했다. 울산에 살 때 엉성하긴 하지만 내가 직접 만든 조명기구가 있고 내게 암실이 있으니 따로 준비할 건 없지만 문제는 조명기구와 배경용 스크린 등을 싣고 갈 차가 없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직원들 누구도 차가 없어 할 수 없이 작은 용달차를 하나 빌려서 양로원에 싣고 갔다.
여직원들은 노인들의 머리를 물을 묻히고 빗으로 빗어 보기 좋게 다듬었고 특히 할아버지들은 무조건 넥타이를 매 드렸다. 그렇게 하려고 미리 콤비 상의 몇 벌과 넥타이 여러 개를 준비해 가지고 갔다. 생애 마지막 사진을 허술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서다.
그런데 노인들 50여 명 중 사진을 안 찍겠다는 분들이 반도 넘었다. 그동안 위문하러 와서 라면 쌓아놓고 사진을 많이 찍어갔는데 사진을 한 장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그렇단다. 이번엔 틀림없이 큰 사진을 액자에 넣어 드리겠다고 약속하고 설득해서 전원이 사진을 찍었다. 촬영에 실패하면 절대 안 되므로 카메라 두 대를 설치해서 두 사람이 동시에 찍었다.
돌아와서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작업에 들어갔다. 거의 다 얼굴에 잡티나 주름이 심해서 이걸 완화하려고 이군의 스타킹을 이용했다. 캐리어에 필름을 걸고 인화지에 노광할 때 스타킹을 팽팽하게 당겨서 렌즈 아래에서 살살 흔들어 주면 빛이 산란해서 부드러운 빛이 되기 때문이다. 약한 주름엔 스타킹 한 겹이고 큰 주름엔 두 겹이다. 얼룩이나 한 쪽 눈이 없는 분들은 따로 지우고 그려 넣으며 할 수 있는 재주를 다 해서 이유 없이 이쁜 사진을 만들었다. 실제의 얼굴과 다르면 본인이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사진작업을 하고 알미늄 액자를 사와서 사진을 넣어 양로원에 가지고 갔다. 사진을 받아든 노인들의 표정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 서로 서로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나보다 잘 생겼어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 여직원도 눈물을 흘리면서 내게 말했다. 저 이제까지 사진을 하면서 지금처럼 보람을 느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며칠이 지나 양로원에서 직장에 전화가 왔다. 그렇게 사진을 만들어줘서 노인들이 너무나 좋아한다면서 고맙다는 전화인데 막상 직장에선 그 일을 모르고 있다가 그제서야 알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일을 할 때는 회사에서 차도 지원해 주고 필름이며 인화지나 액자 등의 비용도 전부 다 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린 9년간이나 양로원이나 지역 노인정 등을 다니며 장수사진 작업을 했다. 지역 신문이나 TV에도 방영되어 직장에선 지역주민들에게 좋은 홍보가 되었다며 적극 지원했다. 그 후 내가 근무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또 여름이면 서울의 어느 대학에서 내려와 장수사진을 찍어주기도 해서 우리의 작업도 끝맺게 되었다.
낙수1-
어느 마을에 장수사진 찍으러 갔는데 할머니 한 분이 손바닥만한 사진을 가지고 와서 이 사진을 크게 만들 수 없겠느냐고 한다. 사진을 보니 정장에 나비 넥타이를 맨 아주 잘 생긴 남자였다. 문제없이 마크로 촬영해서 8인치*10인치 액자에 넣어 드렸다.
“아드님이 아주 잘 생기셨습니다.”
“아들 아니야, 내 신랑이야. 우리 혼인하고 3일 만에 죽었어.”
결혼식을 하고 3일만에 4.3사태의 혼란 속에 죽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수십 년 세월 동안 신랑의 이 사진을 품고 살았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죽은 신랑이 살아 돌아온 것 같다면서 사진을 얼굴에 부비며 기뻐했다. 이럴 때 내가 사진을 한 보람을 느낀다.
낙수2-
내가 살던 마을 삼양동의 노인정 노인들을 촬영한 날이었다. 암실에서 한참 작업을 하고 있는데 어느 젊은이가 찾아왔다. 낮에 사진 찍을 때 아버지도 찍었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한다. 장수사진이 영정사진이 되었다. 유족들에겐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었다.
액자에 넣는 일은 늘 이군과 동료 한 분이 동원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