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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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일차-10월 5일/힐레-티케둥가-울레리-고레파니
Hile-Tirkhedhunga-Uleri-Ghorepani
소중한 삶
지난 밤 8시 반경 자리에 들었는데 02시에 잠이 깼다. 충분히 잤다. 침낭에 내피까지 넣고 잤는데 약간 더워 내피를 빼면 이번엔 좀 추위를 느꼈다. 몸이 온도
조절을 제대로 못하니 그런 모양이다.
03시경 자리에서 일어나 밖에 나가보니 엊저녁에 떠 있던 상현달은 지고 없고 맑게 갠 하늘엔 별들이 가득하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맑은 음악처럼
청량하게 다가온다.
엊저녁에 주위를 살펴보니 롯지의 바로 곁에서부터 아래 강변까지는 벼가 노랗게 익어가는 논이다. 그리고 건너편 강변에서 산꼭대기까지 다랑논이 이어져있다.
군데군데 민가의 불빛이 보인다. 저 집엔 누가 살고 무슨 꿈을 꾸며 자고 있을까. 문득 전에 읽었던 오영수 님의 단편 ‘메아리’가 생각난다. 힘들게 살아도 그렇게
살면 되는 거 아닐까. 그게 행복한 삶이 아닐까. 어디서 어떻게 살던 삶이란 더 없이 소중하다. 단 한 번 내게 주어진 삶 어떤 경우에도 절대 절대 포기해선 안 된다.
전화
아침에 롯지의 전화로 이군에게 전화를 했다. 산중에서 하는 국제전화여서 말 그대로 ‘용무만 간단히’ 했다. 몸 건강히 잘 걷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이런 전화 안 해도 되지만 집 떠나기 전날까지 병원신세를 졌으니 혼자 집에 있는 이군이 얼마나 걱정할까 싶어서다. (이런 걸 보면 나도 꽤 애처가에 속한다는
생각이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군의 말이 시작 되길래 ‘엉, 알았어~’하고는 끊어버렸다. 말 다 들으려면 전화비 많이 나오는 건 둘째 치고 오늘 난 트레킹 못한다.
그리고 이군의 말은 안 들어도 다 안다. 식사 많이 하시고, 잘 주무시고, 힘들면 거기서 포기하시고, 사진 찍는다고 위험한 데 가지 마시고, 특히 예쁜 여자
보다가 혼자 떨어져 길 잃지 마시고... 등등이다.
고레파니(Ghorepani)로 가면서
07:25분, 롯지의 계단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 고레파니(해발 2,860미터)로 출발했다. 고도를 1,400미터나 올려야 하는 날이다. 그러나 1,400미터란 힐레와
고레파니의 단순 고도차이만 계산한 것이고 실제로 오르고 내리는 길은 그 몇 배 더 된다고 보면 된다. 한라산 성판악에서 정상까지의 고도차이가 1,200미터도
안 되고 더구나 오르막 내리막이 없는 코스라는 걸 감안하면 오늘은 북한식으로 말하자면 ‘고난의 행군’을 하는 날이다.
깎아지른 돌계단 고갯길을 숨을 헐떡이며 오르고 또 오른다. 그렇게 힘들여 올라서서는 또 급경사길을 끝도 없이 내려간다. 그리고는 또 오르고, 그러면서
차츰 고도를 높여가니 걷는 맛이 그냥 죽을 맛이다. 그래도 어쩌랴, 안나푸르나 여신을 만나려면 이 길 밖에 없는 걸.
티케둥가(Tikhedhungga), 울레리(Ulleri)를 지나 걷고 또 걷는다. 땀을 줄줄 흘리며 걷는다. 울레리를 지나 이제 막 이삭이 나온 보리밭을 만났다. 힐레에선
벼가 노랗게 익은 논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우리의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가 아무 소용이 없겠다.
울레리에서 반탄티로 가는 까마득한 오르막길 도중 몇 군데에 작은 위령탑이 있다. 5년 전 폭우로 산사태가 나서 한꺼번에 몇 개 마을이 휩쓸려 집과 주민
모두가 사라졌는데 그때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후손들이 세웠다고 한다. 오르면서 보니 여기저기에 집을 세웠던 흔적도 보인다.
10:35분, 반탄티(Banthanti)에 도착했다.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도 먹었다. 점심을 기다리면서는 신발도 벗고 양말도 벗고 맨발을 햇볕에 쪼이면서 발을 쉬게
했다.
불쌍한 내 발... 두 겹의 양말과 든든한 등산화에 조여 숨 쉬기도 힘든데다 내 체중과 촬영장비의 하중을 모두 감내하는 발, 이 발이 없으면 내 사진도 없다.
고지대여서 잠시만 그늘에 있어도 으스스하도록 서늘해서 옷을 하나 더 꺼내 입었다. 점심은 카레밥이 나왔다.
지르텍
12;15분 출발-. 다시 숲을 지나고 다리도 건너고 돌계단을 오르며 걷는다. 맑은 물이 쏟아지는 폭포도 수시로 나타난다. 다행히 오늘은 오후 들어 햇볕이 나지
않고 구름이 끼어 그래도 덜 더운 셈이다.
어제 벌에 쏘여 얼굴이 부었던 권정회 씨는 오후 들어 계속 콧물이 흐르고 기침을 해서 내가 휴대하고 있던 콧물 알레르기약 지르텍을 한 알 줬더니 30분 후부터
콧물도 기침도 그쳤다. 난 그 약을 겨울 한라산의 비상약으로 사서 한 번 먹어보지도 않았던 것인데 의외로 벌독에도 안성맞춤이었던 모양이다. 이래서 비상약은
카고백에 넣지 말고 휴대해야 한다. 내가 놀렸다. 민중의 지팡이가 몸이 아파 힘들어할 땐 반대로 민중이 도와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이제부터는 내가 지팡이
노릇을 할 테니 걱정 말라고 놀렸다. 팔자 사나운 사람은 히말라야에 와서도 지팡이 노릇을 하나보다. 내일쯤이면 얼굴 부기도 다 빠질 것 같다.
고레파니 도착 그리고 다울라기리와의 만남
점심 먹고 세 시간을 더 걸어 15:10분 고라파니에 도착했다. 우리 숙소는 고라파니에서도 제일 꼭대기를 넘어간 곳이어서 또 20분을 더 걸었다. 롯지에서
고도계를 보니 해발 2,996미터 기압 732hPa이다.
오늘도 참 많이 걸었다. 비 오듯 흘린 땀으로 속옷은 물론 바지까지 젖을 정도다. 룸메이트 하경수 씨가 낮에 길가에서 파는 바나나를 샀는데 아주 맛과 향이
좋아 여러 개를 먹었다. 룸메이트 잘 만나면 이렇게 맛있는 것도 얻어먹을 수가 있다. 이경수 씨는 아침 저녁 밥 먹을 때마다 카메라 들고 사진 찍는다면서
내가 밥 제대로 못 먹는다는데 사진은 한 낮보다 아침 저녁에 찍을 게 많고 또 밥 먹을 때는 걸을 때보다 시간이 좀 더 있으니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사진 찍으러
왔지 밥 먹으러 왔나 뭐~.
일몰 무렵 갑자기 롯지 정면으로 안나푸르나 남봉(Annapurna South 7,219m)과 바라시카르(Bharha Shikhar, 7,647m)가, 그리고 좌측으로는 다울라기리
(Dhaulagiri 8,172m) 구름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트레킹을 시작한 후 처음 만난 설산은 멀리서 아스라하게 보이다가 차츰 가까이 보이는 게 아니라 이렇게 난데없이 바로 눈앞에 나타난다. 3층으로 뛰어 올라가
숙소의 창문을 열고 삼각대를 세운 후 계속해서 셔터를 눌렀다. 걸으면서 400으로 올려두었던 ISO감도를 100으로 낮추었다. 촬영한 사진을 프리뷰해서 10배로
확대한 후 선명도를 확인까지 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침착해야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며 혹여 서두르다 실수할까 봐 조심 또 조심했다.
이윽고 해가 지면서 설산들은 황금빛으로 그리고 다시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안나푸르나 남봉의 거대한 모습에 압도 당하면서도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계속
셔터를 눌렀다.
행복하다...
방안에서 맨발로 이 웅장한 설산의 모습을 바로 앞에서 담을 수 있다니....
저녁은 닭도리탕이 나와서 맛있게 먹었는데 땀에 젖은 옷을 물에 빨아도 말릴 새가 없어 큰일이다. 집에 갈 때까지 지퍼백에 넣어 계속 가지고 다녀야 하나.
집에 가면 다 썩어 거름이 되지 않을까...
하룻밤 묵은 롯지에서
죽기 살기로 걷고 또 걷는다.

눈까지 마음까지 시원해 진다.
별별 사람들이 다 이 길을 걷는다.
바라시카르가 먼저 나타났다.
안나푸르나 남봉과 우측에 히운출리가 나타났다.
멋지다......!!
다울라기리도 나타났다.
이런 풍경 앞에선 밥 안 먹어도 된다.
밥은 집에 가서 먹으면 된다.







